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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파타고니아의 요정들

요정은 그 아름다움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기 때문에 사랑과 질시의 대상이 됩니다. 자신을 좀 더 감출 줄 알았더라면 사랑만 듬뿍 받았을 텐데. 감출 수 없는 과시욕 때문에 나신(裸身)을 드러낸 채, 땅을 박차고 일어나 있어 결국 질투를 불러들입니다.

 

피츠로이(Monte Fitz Roy/ 3,359m)와 세로토레(Cerro Torre/ 3,128m)를 마주하고 있으면 두 봉우리의 자만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파타고니아의 중심지인 엘 칼라파데(El Calafate)에서 차량으로 피츠로이와 세로토레를 품은 마을 엘 찰텐(El Chalten)을 향해 달립니다. 차량은 2시간을 달려 벌판에 홀로 버려진 듯 한 카페에 섭니다.

 

전설적인 열차 강도 부치 캐시디(Butch Cassidy)와 선댄스 키드(Sundance Kid)를 찾아 나선 보안관이 멀리 파타고니아까지 찾아왔는지 현상금 포스터가 붙어 있습니다. 진실게임을 하기는 어렵지만, 카페는 그 포스터 한 장으로 꽤나 유명세를 탔습니다.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는 우유니 사막을 끼고도는 환 고리 형태의 여러 마을 중 하나인 산 비센테(San Vicente)에서 1908년 볼리비아군에 의해 최후를 맞습니다.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열연한 ‘내일을 향해 쏴라’ 라는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면 그들은 단순 강도라기보다 꿈을 좇는 사내들 같아 보입니다.

 

다시 차는 1시간을 달려 작은 산간마을인 엘 찰텐에 내려놓습니다. 그곳은 전화도 메시지도 안되는 정음(停音)의 세계입니다. 호텔에 짐을 풀고 피츠로이와 세로토레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로 발길을 옮깁니다. 한여름인 12월의 파타고니아는 10시를 넘어도 사물을 분간할 만치 훤하여 전망대로 불리는 작은 언덕배기에 올라서면 타들어 가는 봉우리의 열정을 느끼게 됩니다.

 

해 걸음을 더디게 딛으며 다가오는 석양에 붉게 타오르는 피츠로이와 세로토레, 고요하리만치 스며드는 햇살을 머금은 빈 낮의 봉우리는 붉게 타오르고 다시 검게 주저앉습니다. 자신을 불사르며 빛을 토해내는 봉우리를 보고 있노라면 두 봉우리의 서로 다른 개성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적합한 표현인지 모르지만, 피츠로이가 가족사진이라면 세로토레는 한 발로 선 채 하늘로 향하는 요가 자세라고나 할까요… 찰텐에서의 첫날, 피츠로이, 세로토레만이 아닙니다. 강렬한 복사열에 마주한 듯 저 자신도 몸이 천천히 달아오릅니다.

 

피츠로이 트레킹은 엘찰텐마을에서 시작해서 같은 길로 돌아오는 방법과 차량으로 엘 필라르(El pilar)로 이동하여 트레킹을 시작하고 엘찰텐마을에서 끝내는 두 방법이 있습니다. 트레킹의 초보자이거나 체력이 약한 분이 아니라면 엘 필라르에서 시작하는 트레킹을 훨씬 맛이 깊습니다.

 

반면 체력이 약한 분은 능력만큼 가고 그만 돌아와야 하니 엘찰텐에서 시작하는 편이 좋습니다. 트레킹 거리가 왕복 22km인걸 감안하면 등산로가 평탄하다고 해고 하루에 완주하기엔 긴 거리이니만치 무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엘 필라 마을에 내려 블랑코 강(Blanco river)을 따라 천천히 피츠로이로 다가가는 트레킹은 맛이 깊은 상념 같습니다.

 

블랑코 강줄기를 쫓다 보면 숲과 강줄기가 이 조화를 이루고 미끈하기만 한 암봉이 바라보는 각도에 조응하여 다른 얼굴로 반색합니다. 블랑코 강을 따라 3시간을 걸으며 포인세노트(Poincenot)에 다다르는데, 여기서 가파르고 헐벗은 오르막이 숨을 턱 막고 섭니다.

 

이 오르막을 40분 올라야 피츠로이가 감추어둔 빙하호수가 반기니 멈출 수 없는 선택이기는 합니다. 피츠로이 트레킹은 22km에 달하는 길고 먼 거리라지만 포인세노트에서 빙하전망대에 이르는 긴 오르막을 외면하는 건 궁극의 이상을 지향하는 인류애가 아니니 힘을 내 거친 오르막을 오릅니다.

 

그리고 마침내 대면하는 빙하호수, 살벌한 바람과 냉기가 엄습하는 또 다른 대지의 얼굴입니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비바람과 냉기가 거침없이 몰아치고, 어렵사리 마음을 추슬러 피츠로이와 빙하호수를 가슴 가득 담아봅니다.

 

아름다운 피츠로이

 

왜 이 봉우리에 피츠로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요… 이름값을 한다는 대상물의 가치를 무게추에 달아보아도 이름은 무겁기만 합니다. 피츠로이는 남미대륙 탐사선인 비글호의 선장 이름입니다.

 

당시 이 배에 오른 풋내기 청년이 또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도 유명한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입니다. 하지만 철부지 청년은 자신이 무엇을 이룰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배에 오른 청년이었습니다. 철부지 청년이 1870년 친구인 ‘윌리엄 프레이어’ 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 청년이 얼마나 준비 없이 비글호에 승선했는지 보여줍니다.


[모든 책 중에서 흄 볼트의 여행기(Humboldt’s Travel)만큼 감명받은 책은 없습니다. 그 책의 여러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답니다. 카나리아제도(Canary Islands)를 가려 했는데, 비글호 탐사 제의를 받고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해부학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동물학에 대해서도 체계적인 글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복잡한 현미경은 건드려보지도 않았으며 지질학도 6개월 전에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는 비글호 위에서 공부를 시작했던 겁니다.]

 

데이비드 애튼버러(David Attenborough)가 서간을 모아 발간한 “찰스 다윈의 서간집”에는 찰스 다윈이라는 위대한 학자도 첫발은 회의와 불안으로부터 시작했으며 성공하기까지 인간이기에 겪어야 했던 고뇌와 갈등을 다양하게 다룹니다.

 

종의 기원은 이렇듯 어떤 기획과 확신에 의해 쓰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편지에서와같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뛰어든 용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칠스 다윈은 “종의 기원”을 저술함으로써 인류에게 사고의 전환을 가져다준 위업을 이룩했으며 그 시작은 의학을 중단하고 뛰어든 비글호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기회를 제공한 배의 선장이 피츠로이였습니다. 피츠로이는 명예를 중시하며 신앙심이 깊은 인물입니다.

 

그는 노후에 자신의 배에 탑승한 풋내기 청년이 신의 전지전능과 배치되는 “종의 기원”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는 분격했으며 더욱이 자신이 그의 탑승을 허락한 데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자결을 택하는 구시대의 유물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 완고한 인물의 이름을 시린 바람이 휭 휭 부는 암봉에 붙여졌습니다.

 

파타고니의 최고봉인 피츠로이의 당 시대에 새로운 등산 사조를 이끌어가던 프랑스의 등반가 리오넬 테레(Lionel Terray)와 귀도 마뇽(Guido Magnone)에 의해 1952년에 이루어집니다.

 

비록 에드워드 윔퍼(Edward Whymper)에 의해 마테호른(Matterhorn/ 4,478m)이 초등 됨으로써 알프스 황금기는 영국에 빼앗겼다지만 알프스를 국경으로 두고 있는 프랑스와 이태리는 모두 산악강국으로서 손색이 없는 업적을 쌓아갑니다. 특히 파타고니아에서 펼친 프랑스, 이태리 산악인들의 활동은 거의 독보적입니다.

 

리오넬 테레와 귀도 마뇽은 영국이 추구하던 대규모 물량동원을 통한 등정 위주의 과시적 등반을 거부하고 등반을 고뇌와 소통을 통한 미적 세계로 끌어들인 멋의 창시자이기도 합니다. 이들 둘이 줄을 맞잡고 한발씩 파타고니아의 자연조건과 피츠로이의 난해함을 이해하며 멋지게 오른 등반이 피츠로이 초등입니다.


호수 전망대로 불리는 둔턱에 올라 바람을 헤치며 호수로 다가가니 호수 위로 암봉이 투영되어 하늘거립니다. 원주민들은 피츠로이를 연기를 내뿜는 산 즉 엘찰텐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원주민이 바라본 산은 구름이 암봉에서 피어나고 온종일 구름 속에 잠겨 자태를 보여주지 않는 신비한 그 무엇이었습니다. 몽블랑 정상에 귀신이 산다는 유럽인들의 믿음과 같이 원주민에게 피츠로이 꼭대기는 인간이 넘볼 수 없는 신의 세계였습니다.

 

몽블랑에 오른 발머가 귀신을 만나지 못했듯이 테레와 마뇽도 피츠로이 정상이 다른 봉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았을 겁니다. 그러나 피츠로이에 오른 테레와 마뇽은 하산하던 도중 건너편의 암봉, 세로토레를 처음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피츠로이 등반보고서에 세로토레에 대한 첫인상을 남깁니다.


“우리는 세로토레를 보았다. 그것은 거의 등반이 불가능한 것처럼 거대한 기둥으로 홀로 서 있었다.”


테레와 마뇽에 의해 당대 불가능의 상징이자 대담한 도전의 대상으로 떠오른 세로토레, 불가능은 가능을 꿈꾸는 산악인들의 열정을 빨아들였고 전설 같은 세로토레 영웅담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세로토레 트레킹은 처음 30분 오르막이 끝나면 평지 길을 따라 계곡 안까지 깊숙이 들어갔다 되돌아오는 편안한 트레킹입니다. 왕복 거리가 20km에 달하지만 6~7시간이면 왕복이 가능합니다. 계곡 끝에는 빙하호수가 있고 호수 너머 봉우리는 송곳같이 뾰족하기만 한데, 이 봉우리가 세로토레로 불리는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침봉입니다.

 

침봉은 두 개로 가지런히 서 있는데. 주봉은 세로토레로 불리고 위성봉은 세로 에거(Cerro Egger/ 2,850m)로 불립니다. 세로 에거는 세로토레 등반 중 추락사한 첫 희생자로 그는 세로토레와 첫 대면을 하고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토레는 환상적인 산으로 거대한 화강암 탑이다. 그 벽은 치즈를 칼로 자른 듯이 보인다. 상단부는 얼음으로 뒤덮여 있으며 암탑의 벽은 빙하에서 정상까지 1,000m 치솟았다.”


하루재 클럽(HBC)에서 출간한 등반서 ‘세로토레, 메스너, 수수께끼를 풀다’는 세로토레에 관련된 등반이야기를 메스너가 집약 나름의 해석을 달아놓은 책입니다. 너무도 잘 알려진 메스너가 저술한 책이기도 하고 지구의 끄트머리 세로토레에서 벌어진 경쟁과 논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라서 산악서적으로 가치가 높은 책입니다.

 

이 책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나옵니다. 한 명은 돌로미테의 거미로 불리는 ‘체사레 마에스트리(Cesare Maestri)’이며 다른 한 명은 당대를 대표하는 등반가 ‘월터 보나티(Walter Bonatti)’입니다. 보나티는 뛰어난 등반가로 널리 알려진 반면 체사레 마에스트리는 돌로미테 지역에서만 유명할 뿐 익숙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하지만 세로토레 등반을 통해 본 마에스트리는 자유롭고 열정적이며 시대를 대표하는 거벽 등반가이면서도 과시욕과 영웅주의에 빠져 비정상적인 집착으로 일관하는 독선적인 산악인입니다. 두 사람은 당대를 대표하는 산악인이었지만 성향과 철학은 전혀 달랐습니다.

 

또한, 활동지역도 달랐습니다. 보나티가 서알프스에서 활동했다면 마에스트리는 동 알프스의 돌로미테에서 활동했고, 보나티가 자연주의자고 행위와 도덕에 엄격했다면 마에스트리는 자유주의자고 편의적 사고를 가져 둘에게서 공통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메스너는 이를 사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의 대립이라고도 기술합니다.

 

운명적으로 두 등반가는 국가적 사업인 K2 원정대에 신청합니다. 그리고 K2로 인해 두 사람은 새로운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마에스트리는 뛰어난 등반가이고 대원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었음에도 위궤양이라는 이유를 틀어 대원선발에서 탈락합니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고 내심은 마에스트리가 소통이 안 되고 독단적인 행동을 잘하므로 K2원정 중 불화를 일으킬 것을 우려한 산악협회에서 그를 배제한 것입니다. 마에스트리는 이 사건으로 굴욕감을 느꼈으며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습니다. 그가 세로토레에 인생을 건 이유는 등반이 불가능하다는 세상의 평가를 뒤로하고 정상에 올라 세상에 자신이 최고임을 입증하려는 영웅심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보나티는 K2 대원에 선발되었고, 원정등반 중 가장 많은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동료가 정상에 가져갈 산소를 8,000m가 넘는 마지막 캠프까지 옮겨다 놓는 희생을 하였음에도 탱크에 산소가 얼마 없어 정상등반에 애를 먹었다고 동료의 비난을 받는 수모를 당합니다.

 

보나티에겐 산소마스크가 없었고, 정상에서 찍은 사진 속의 등반자는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후에 누명을 벗었지만, 정상 등반에 가장 큰 공헌을 하고도 비난받아야 했고 긴 논쟁을 벌이고서야 명예를 회복한 불운을 겪습니다.

 

두 등반가는 K2에 잃은 상처를 치유하고자 불가능의 세로토레로 향합니다. 마에스트리와 보나티의 세로토레로 향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듯 같은 이유고 다르지만 같지만은 않은 이유입니다. 마에스트리에게 보여줄 명예가 필요했고 보나티에게 스스로 치유할 자아성취가 필요했습니다.

 

세로토레의 중간 암부에서 둘은 만납니다. 하지만 둘은 가벼운 인사만 나눌 뿐 경험과 정보를 일체 공유하지 않았고, 아이거 초등에서 하인리히 하러와 헤크 마이어가 벽 중간에서 만나 합동등반을 협의하고 두 팀이 하나의 로프에 몸을 묶어 초등을 이루었지만, 마에스트리와 보나티는 서로에게 조금도 자애롭지 못했습니다.

 

결국, 두 등반가는 세로토레 등반을 포기하고 돌아가게 됩니다. 서로 줄을 묶었다면 어땠을까요…

 

보나티는 세로토레를 포기했지만, 마에스트리는 1959년에 다시 세로토레를 찾아옵니다. 그 등반에 토니 에게가 동행하고 에거는 하산 중 눈사태를 맞아 추락사합니다. 마에스트리는 혼자 내려와 불가능의 산 세로토레 정상에 섰으니 자신이야말로 최고의 등반가라고 소리쳤지만, 그가 발간한 보고서는 전후 사정이 일치하지 않아 여러 의혹을 낳게 됩니다.

 

하지만 그 후로도 50년이 지나도록 마에스트리가 오른 등반 루트로는 정상에 아무도 오르지 못해 불가능의 길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그의 정상등반을 증명할 방법도 부정할 방법도 없습니다. 그는 진정 정상에 올랐을까요…


그의 등반보고서는 여러 의혹을 일으켰고 마에스트리는 명예를 얻기는커녕 불신만 키우게 됩니다. 의혹에 시달리던 마에스트리는 1970년 트렌티노 산악인들을 조직하여 다시 세로토레를 찾습니다. 그런데 첫 등정의 의혹을 씻겠다는 등반은 엉뚱하게도 콤프레샤로 화강암벽에 90~100cm 간격으로 350개의 볼트를 박아 정상 설원 아래까지 오르는 새로운 길을 만듭니다. 59년의 첫 등반 루트가 아닌 전혀 새로운 길을 낸 것입니다.

 

이 등반 소식을 들은 보나티는 “콤프레샤를 사용해서 등반하는 자는 알피니스트가 아니다.” 라고 규정했고 이에 대해 마에스트리는 “등반 행위를 어떻게 단정할 수 있겠는가.” 라고 대응했다고 합니다. 등산의 기본 정신은 자유입니다. 자유를 향한 추구가 등산의 정신에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요? 메스너는 “등산에는 규정이 없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스타일이 있을 따름이다.” 라고 마에스트리를 옹호합니다.

 

그런데 그래도 되는 건가요? 그렇다면 등산은 기술적 가치에 준할 뿐이니 자유를 얻기 위해 기계에 속박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무엇이 자유인지 단정하기가 그리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 세로토레는 마침내 인간의 거친 도전에 문을 열어 줍니다.

 

1974년 페라리와 그의 동료들은 세로토레의 정상에 올랐으며 이 등반은 한 점 의혹 없이 초등으로 인정됩니다. 이로써 세계에서 가장 어렵다는 산은 마에스트리의 것에서 모든 산악인의 것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세레토레는 한국 산악인들에게도 도전의 대상입니다. 몇 년 전 한국 여성산악인 3인이 세로토레를 오르겠다고 짐을 꾸려 출발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여성 산악인이 오르려고 한 루트는 70년 마에스트리가 콤프레샤로 볼트를 박으며 힘들게 길을 낸 콤프레샤 루트입니다.

 

그때 마에스트리는 54일의 등반기간 중 28일을 40kg의 콤프레샤를 끌며 벽에 매달려 잠을 잤다고 하니 내용이야 어떻듯 세로토레에 대한 그의 집착은 가히 초인적이라 할만합니다.

 

그리고 그가 토목 건설하듯 길을 낸 화강암벽은 극한의 등반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가장 쉽게 세로토레에 오르는 대중적인 루트가 되었으니 그의 집착도 나름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고 판단됩니다. 설악산 울산암에도 그런 암벽 루트가 있습니다.

 

일본 산악인들이 많은 볼트를 박으면 직선의 화강암 벽에 낸 길을 냈는데, 울산암 볼트길이라고 합니다. 저도 학창시절 일본 산악인들이 고생스럽게 박아 넣은 볼트에 카라비나를 걸며 불가능한 바위 면을 올랐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고약한 일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앞뒤가 안 맞죠… 비난하려면 이용하지나 말지 이용하며 비난하는 건 모순입니다. 그래서 마에스트리가 왜 세로토레에 집착했고, 무엇을 위해 건설공사 하듯 길을 냈는지 더는 묻지 말아야 할 거 같습니다.

 

현재도 이용할 수 있는 가장 편한 길이니 그것으로 가치는 충분하고 나름 기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명의 한국 여성 산악인은 세로토레에서 멈칫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세로토레에 가서 보니 콤프레샤 루트의 볼트가 부분적으로 훼손이 심해서 등반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츠로이로 등반대상지를 바꾸어 등반을 시작합니다.

 

피츠로이를 오르는 일도 대단한 일이죠… 거대한 벽을 오르는 일 자체가 중력과의 싸움이고 마찰과의 극복입니다. 그러니 신이 만든 환경에 대한 거부이고 자연의 법칙에 도전하는 싸움이라서 보통의 사람들이 할 일은 아닌 극한의 열정을 지닌 자들의 놀이입니다.

 

3명의 한국 여성 산악인은 며칠을 벽에 매달리며 등반해야 해서 특수 기저귀를 찼다고 합니다. 대소변을 그대로 말려주는 기저귀를 차고 등반 할 만큼 벽은 잠시의 틈도 주지 않는가 봅니다.


왜 콤프레샤 루트의 볼트는 심하게 훼손되었을까요…


메스너가 쓴 “세로토레”는 세로토레 정상 전 눈 처마에 이르렀지만, 마에스트리의 행복은 한 순간이었고 말합니다. 스페인원정대가 자신이 뚫은 콤프레샤 루트를 따라 정상에 오르려고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라디오에서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들이 우리 루트를 다시 오르려 한다고? 만일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만날 것이다.” 라고 소리치며 하켄을 망가트리고 마지막 구간의 볼트를 부숴버렸다고 합니다.

 

이틀간의 피츠로이 세로토레 트레킹을 마치고 엘찰텐을 떠나며 다시금 두 산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 봅니다. 피츠로이는 웅자의 이야기로, 세로토레는 용자의 이야기로 아름답게 도색되어 있어 보입니다. 피츠로이, 세로토레는 바라보기만 하는 산이 아니라 오르는 봉우리기에 목숨 걸고 오르려는 산악인에게 물어보면 무어라 답할까요… 세로토레에 인생을 건 또 한 명의 산악인 치사노 파바는 제 질문에 답하려는지 이런 말을 남깁니다.

 

“ 죽음이란 완전함의 일부이며 질서의 하나다.”


등반은 자연의 질서에 귀의하는 거친 방법이겠죠…

 

피츠로이, 세로토레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빙하 국립공원인 로스 글레시아레스(Los Glaciares) 국립공원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남쪽엔 페리토 모레노 빙하가 자리합니다. 두 지역을 차로 연결해도 4시간이 소요되니 로스 글레시아레스 국립공원이 얼마나 대단한 규모인지 알 수 있습니다. 빙하보호구역인 로스 글레시아레스 국립공원은 공원 면적의 30%인 2,600km²가 빙하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공원 남쪽에는 페리토 모레노 빙하 이외에도 웁살라 빙하, 스페가찌니 빙하(Glaciar Spegazzini) 등 47개의 대형 빙하 이외에도 200여 개의 소형 빙하들이 군집되어 있는 데. 안데스에서 흘러내린 빙하는 성장 속도가 너무 빨라 호수의 물의 흐름을 막기도 하므로 종종 화약으로 빙하를 깬다고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빙하가 줄어들고 성장 속도보다 녹아서 사라지는 속도가 훨씬 빠른 점을 볼 때 아직도 온난화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지역 같아 보입니다.

 

로스 글레시아레스 국립공원 남쪽의 페리토 모레노 빙하

 

파타고니아에서 세 번째로 찾아가야 할 곳은 페리토 모레노 빙하 트레킹입니다. 오전엔 엉성하지만, 주물로 만든 무거운 크램폰을 신고 빙하 하단을 걷는 이색 체험을 하고 오후엔 빙하 전망대에서 빙하의 전면을 조망하고 돌아오면 하루해가 뉘엿 집니다. 총 8~9시간이 소요되는 하루 여행입니다.

 

빙하트레킹은 1~2시간 소요되는 미니 트레킹에서 3시간에 이르는 빙하트레킹도 있습니다. 20명 정도를 한 팀으로 구성해 빙하의 굴곡과 골짜기를 따라 걷는 빙하 트레킹은 태양이 구름 뒤로 숨으면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들고 태양이 구름을 벗어나면 복사열 때문에 겉옷을 벗게 되니 옷도 단단히 준비해 가야 합니다. 트레킹의 끝은 빙하를 깨서 위스키 언더락을 한잔 건네며 마칩니다.


얼음조각이 얼마의 세월을 지고 여기까지 흘러내려 왔을까요 품고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요…한잔에 한 살 젊어진다고 하니 신비의 명약이 숨겨져 있나 봅니다. 한 살을 위해 한잔을 더 마시고 빙하에서 내려옵니다.

 

광활한 페리토 모레노 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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