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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잉카가 감추어버린 꿈

예일대 고고학 교수 하이런 빙엄은 잉카의 마지막 수도로 알려진 빌카밤바(Vilcabamba)를 찾기 위해 탐사단을 이끌고 우루밤바(Urubamba) 계곡을 따라 아마존으로 떠납니다. 그 길은 잉카가 잔존세력을 이끌고 빌카밤바로 향했던 길이기도 하면서 잉카를 쫒던 스페인 추격군을 아마존으로 안내했던 새로운 잉카가 지나간 길이기도 합니다.

 

잉카의 길을 걸으며 내려다보는 우루밤바 계곡은 아주 가파른 협곡입니다. 좁은 계곡에는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의 땅 밖에 없고 강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깊은 수림과 가파른 사면이 되어 접근이 어렵습니다. 지금은 기차 레일이 있지만 잉카 시대에는 땅을 다지고 나무를 잘라가며 지나가야 했던 아주 피곤한 계곡 길입니다.

 

말과 대포를 가지고 망꼬 잉카를 추격한 스페인으로서도 그렇고 갖은 세간을 전부 메고 이동했던 잉카 저항군도 쉽지 않았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을 조금만 벗어나면 이동하기 편한 잉카의 길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거친 계곡을 헤치고 지나갔으니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요,

 

잉카의 길은 잉카 제국 전체를 거미줄과 같이 이어놓은 통치수단으로써, 로마의 길 다음으로 긴 길입니다. 모든 잉카의 길은 쿠스코에서 시작되어 쿠스코에서 끝이 납니다. 쿠스코와 마추픽추를 연결하는 잉카의 길이 있었고 이 길은 쿠스코에서 시작하여 마추픽추에서 끝이 납니다. 그렇다면 이 길은 마추픽추와 연결하기 위해 특별히 만든 길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마추픽추는 무엇이었을까요, 잉카는 왕이었지만 그들마저 마추픽추의 존재를 몰랐던 것일까요, 아니면 마추픽추를 감추기 위해 계곡 길을 택했던 것일까요, 잉카 트레일(Inca Trail)을 걷는 내내 의문점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잉카 트레일은 우루밤바 계곡을 따라 걷는 정통 트레일로 쿠스코에서 약 88km 떨어진 역에서 시작하여 3 ~ 4일 정도가 소요되는 약 48km의 거리입니다.

 

반면 이렇게 길게 걷지 않는 트레커들을 위한 일일 트레킹 코스도 있습니다. 일일 트레킹은 쿠스코에서 약 104km 떨어진 역에서 시작해 마추픽추의 입구인 인티푼쿠(Inti Punku, 태양의 문)까지이며 6시간 정도 소요되는 약 18km의 거리입니다. 인티푼쿠에서 셔틀버스 타는 곳까지 1시간 정도를 더 걸어야 하니 걸음이 조금 늦으면 8 ~ 9시간까지 소요되기도 합니다.

 

셔틀버스는 5시경에 끊어지기 때문에 셔틀 버스를 놓치면 2시간 이상의 길을 걸어 내려가야 하니 마지막 버스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젊은 학생들은 편도 $12의 버스비가 부담스러워 일부러 걸어가기도 하지만 걷기엔 너무 먼 길입니다.

 

잉카 트레일 시작점 표지판

 

빙엄 교수는 아구아 칼리 엔테스(Agua Calientes) 마을에 닿았을 때 어린 목동으로부터 산 위에 거대한 도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린 목동의 말을 반신반의 했습니다. 산 위에 펼쳐진 마추픽추를 계곡에서는 볼 수 없었고 열대의 구름이 언제나 산을 감싸고 있어 잉카의 도시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빙엄은 곧 어린 목동을 앞세워 오늘날 셔틀버스가 다니는 산의 사면에 오릅니다. 그리고는 천신만고 끝에 마추픽추를 발견하게 됩니다. 초기의 연구는 이러한 빙엄의 기록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외부 학자의 접근을 막은 것도 있지만 그는 많은 유물을 미국으로 가져갔으며 왜곡 또한 심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세 창문의 사원에 가면 가운데 커다란 돌이 있는데 빙엄이 저기에 있던 돌을 이리로 옮겨다 놓았다고 설명합니다. 그가 남긴 기록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를 의심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는 고고학적 탐사를 통해 마추픽추가 잉카의 마지막 도시인 빌카밤바라고 발표합니다.

 

초기의 연구는 그의 기록에 의해 의존했기 때문에 곧 마추픽추를 잉카의 마지막 도시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더해지면서 빌카밤바가 아닌 잉카의 기록에는 없는 새로운 도시라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산 위에 펼쳐진 마추픽추

 

마추픽추는 네 구역으로 나뉩니다. 수로를 기점으로는 주거지와 경작지, 넓은 광장을 기점으로는 위쪽은 신전지역 아래쪽은 일반 주거지역으로 지어진 계획적인 도시입니다. 마추픽추에는 약 2,000여 명 정도가 거주했던 것으로 판단되며 신전, 일반 서민이 살았던 집터, 공용 건물, 경작지인 밭 등 완전한 자족 도시의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추픽추는 어떤 기능을 했던 도시이고 주민은 누구였을까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농업이나 제사에 필요한 날짜를 계산하는 역할이었던 천문대 인티와타나(Intihuatana),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Temple de Lastres Ventanas), 태양의 신전(Temple de Sol), 거울의 신전(Temple of Mirror) 등 신전이 밀집한 지구로 만들어진 것을 볼 때 왕실 신전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리고 주거 지역은 신전에 헌정된 신녀들의 주거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마추픽추 주변에서 잉카의 머미가 발견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다른 추측들도 가능합니다. 머미를 만드는 과정은 정성과 시간은 물론 많은 비용이 들어갑니다. 어느 시대건 머미는 왕족이나 특권층 등 일부에게만 허용된 과정으로 누구나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많은 수의 머미가 밀집해 있고 쿠스코와 일대일로 연결되어 있으며 특별한 이유로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았던 장소라면 왕실의 무덤이었을 이유가 충분합니다. 왕은 자신이 죽은 후 도굴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철저하게 숨겼기 때문에 망꼬 잉카가 잉카의 길을 따라 도피했다면 마추픽추를 지나야 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일반 병사들이 마추픽추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스페인 군을 이끌고 마추픽추를 지나갔다면 역시 마추픽추의 안녕은 없었을 것입니다.

 

마추픽추로 들어오는 잉카의 길은 존재했으나 숨겨진 미로와 같습니다. 잉카의 길은 위나이 와이나(Winay Wayna)에서 끊어졌고 더 이상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빙엄 역시 위나이 와이나까지는 찾아왔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포기했습니다. 위나이 와이나에서 인티푼쿠까지는 1시간 정도면 닿는 아주 가까운 거리이지만 가파른 산 너머에 마추픽추가 있고 위나이 와이나는 산의 반대편에 있으니 보통의 상식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어찌된 것일까요, 위나이 와이나는 축조된 성곽과 가파른 사면을 다듬은 경작지로 되어있는 3 ~ 4일간의 잉카 트레일 마지막 야영지이자 일일 트레킹의 경우 점심을 먹는 넓은 유적지입니다. 일종의 땀보 역할로 경작지에서 경작된 작물은 인구 과밀 지대인 마추픽추에 제공하는 공급처 역할을 했었습니다. 우루밤바 계곡 아래에도 잉카의 경작지가 보입니다.

 

이곳저곳에서 경작한 작물을 모아 보관하고 필요할 때 마추픽추로 공급하는 땀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길이 사라졌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비상시에 마추픽추를 지키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 그렇다면 마추픽추에는 누가 살았고 그들은 외부와 고립된 채 무엇을 지키고 있었을까요, 신화 같은 이야기이지만 고대에는 성스러운 부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민족의 가치를 지켰고 특정 지역에 고립되어 살기도 했습니다. 즉 외부와 단절되어 신과 민족의 가치를 지키며 살았던 부족입니다. 그런 부족이 잉카에는 없었을까요, 자신들의 조상이었던 잉카의 혼을 지키며 살았던 특별 구역이 마추픽추는 아니었을까요.

 

위나이 와이나의 경작지이자 유적지의 모습

 

잉카를 중심으로 했던 관료 조직은 왕족 계층에 속하는 11개의 관리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지배 계층과 일반 백성의 두 계층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지배 계층은 티티카카의 전통 부족이며 잉카의 순수 조상인 꼬야족 혹은 왕족간의 근친혼을 통해 권력을 세습했습니다. 일종의 신라 성골제도에 가깝습니다.

 

꼬야족은 9대 파차쿠텍이 티티카카를 정복함과 동시에 쿠스코로 대거 이전해 왔습니다. 이들에 의해 쿠스코의 석조 건축이 시작되고 마무리 된 것입니다. 이들이 마추픽추 또한 건축했을 공산이 크지만 어느 순간 이들은 잉카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고 꼬야족이야 말로 가장 순수한 잉카의 정통이 되었습니다.

 

왕족과 꼬야족의 결혼이 같은 권력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은 그들이 가장 성스러운 위치에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같은 뿌리라 해도 피지배 민족인데 지배 민족의 정신을 지배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종교와 문화의 지배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꼬야족은 종교를 지배하며 잉카의 정신과 문화를 지배했습니다.

 

마추픽추의 성격이 이제야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종교를 지배한 꼬야족은 잉카를 영원히 지배할 종교적인 성지를 건축했고 그 곳에 꼬야족의 자식이자 태양의 아들인 잉카와 꼬야족의 종교 지도자들의 머미를 모셔둔 것이 아닐까요, 이들이 헤게모니(Hegemony)를 갖고 있는 한 꼬야족의 잉카 지배는 영원할 테니까요…

 

마추픽추의 또 다른 미스터리는 잉카 브릿지입니다. 마추픽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숨겨진 잉카 브릿지는 거대한 절벽에 위태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다리는 끊어진 길을 잇기 위한 수단이지만 잉카 브릿지는 이어진 길을 끊는데 쓰였습니다. 그러니 잉카 브릿지도 마추픽추와 연관되는 것입니다.

 

마추픽추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잉카 브릿지를 건너고 산을 넘어 더 깊은 어딘가로 사라졌습니다. 그것도 깨끗하게 정리하고 떠난 것이 아니라 채석장에는 자르다 만 돌이 쌓여있고 90%밖에 완성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 숨어 살았지만 왜 떠났을까요, 그 때를 예언하기라도 한 듯이 잉카 브릿지를 만들었을까요, 무엇을 지키려했고 무엇을 가지고 사라졌을까요.

 

잉카의 길을 따라 위나이 와이나에서 인티푼쿠까지 오는 길에는 세 개의 잉카 유적이 있습니다. 모두 가파른 오르막 끝에 지어진 작은 성곽이고 마추픽추에서 밖으로 향하는 방어적인 형태의 건축물입니다. 누군가 침입했을 때 목숨을 걸고 지킨다면 꾀나 오랜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는 방어물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그 시간을 벌어주려고 했던 것일까요, 마추픽추에 사는 누군가일 것입니다.

 

그들이 무사히 잉카 브릿지를 건너 어디론가 사라지게 도와주려는 수단입니다. 잉카 제국에는 왕으로서의 잉카가 아닌 제국의 정신을 지배하는 하늘의 아들이 있진 않았을까요, 그가 머문 장소가 마추픽추였고 약 2,000여 명의 사람들은 그를 모시던 신녀와 신성을 지키는 군대가 아니었을까요, 갑자기 다빈치 코드의 성배가 떠오릅니다. 예수가 남긴 성배는 핏줄이었습니다. 잉카에도 숨겨진 성배가 있을 법 합니다.

 

거대한 절벽에 위태하게 만들어진 잉카 브릿지

 

하루 탐방할 수 있는 인원이 잉카 트레일과 와이나 픽추(Wayna Picchu)는 약 200여 명, 마추픽추 또한 1997년 지진 이 후 약 2,000여 명만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루 약 2,000여 명으로도 마추픽추는 북새통을 이루어 사람들에게 떠밀려 다닙니다. 중간 중간 예리한 눈으로 관리인이 이탈하는 사람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말뚝과 말뚝을 연결한 줄 안에서 일렬로 이동해야 하고 진행 방향도 정해져 있으니 나만의 여유를 갖기에는 어렵습니다.

 

참 재미없는 그저 안 해도 되는 관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첫 목적지는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입니다. 잉카 제국의 시조인 망꼬 까빡은 자신이 출현한 곳을 기리기 위해 창문이 세 개인 신전을 지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망꼬 까빡이 출현한 티티카카 호수의 태양의 섬에는 친카나(Chinkana)라고 불리는 바위가 존재하는데 이 바위는 여러 개의 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혈의 형태가 사다리꼴이어서 잉카의 창문은 사다리꼴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역시 사다리꼴 모양을 한 3개의 막힌 창문으로 벽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잉카의 3대 성지는 쿠스코의 코리칸차, 마추픽추 그리고 티티카카의 이슬라 데 솔(Isla del Sol, 태양의 섬)입니다. 신성의 땅에는 신전이 있고 신전에는 봉헌된 신녀들이 있습니다.

 

코리칸차에 봉헌된 신녀들이 머문 곳을 케츄아어로 '아쿠야와시'라고 했다면 이슬라 데 솔에 봉헌된 신녀들이 머문 곳은 아이마라어로 '아낙우유'라는 곳입니다. 신녀는 신을 위해 존재하니 태양의 신이 힘을 잃는 순간 그녀들은 모두 죽음을 당합니다. 마추픽추의 신녀들은 어땠을까요, 감추어진 신성의 도시이다 보니 의혹만 남습니다.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을 지나면 인티와타나로 이어집니다. 태양을 붙잡아 둔 곳이라는 뜻을 가진 해시계입니다. 약 200톤의 거대한 바위에 높이 1.8m, 너비 36cm의 돌기둥이 솟아 있는 하나의 돌입니다. 아마도 훨씬 큰 통 바위를 깎아 돌기둥을 만들어 세운 듯합니다. 동지 때 잠시지만 이 돌기둥 위에 있는 막대기로 태양이 위치하기 때문에 그림자가 생기지 않으니 매년 동지 때면 태양을 붙잡으려 돌기둥에 끈을 묶는 의식을 치렀다고 합니다.

 

잉카인들은 천체의 궤도가 바뀌면 커다란 재앙이 생긴다고 믿었고 그런 연유로 태양을 붙잡아두려 했다고 합니다. 마치 마야나 아즈텍에서 본 제 5태양계의 종말을 어떻게든 피하려한 의식을 이들도 공유한 것 같습니다. 인티와타나를 지나면 에너지가 넘친다는 잉카의 돌이 있고 그 돌을 지나면 태양의 신전이 나옵니다. 마추픽추의 모든 유적은 하나의 건물을 제외하고는 재건되었으나 다시 보수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빙엄이 남긴 초기의 사진에도 잘 나타나있는데 폐허와 같은 건물 잔해 주변으로 무너진 돌들이 가득합니다. 이 돌들을 끼워 맞추어 건물들을 복원했고 그 과정을 거쳐 현재의 마추픽추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잉카 시대의 건물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태양의 신전입니다. 잉카의 석축은 정밀하고 과학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하지만 모든 건축물들을 그렇게 지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신전이나 왕궁 등 특별한 건축물에만 정성을 쏟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마추픽추에도 잉카의 정성이 담긴 건축물들은 원형의 모양을 유지하지만 일반 건축물들은 크게 남아 있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태양의 신전이 마추픽추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었을 테니 가장 정성스럽게 건축되었을 테고, 잉카 시대에 지어진 그대로 온전하게 보존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안내자 사울은 들어가 볼 수 없는 저에게 하나의 사진을 보여주며 마술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가 보여준 사진은 어두운 방에 해가 들고 방 가운데에 자리 잡은 검은 돌이 빛을 내며 독특한 그림자를 만든 사진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일 년에 한 번 동짓날에 일어난다고 합니다. 즉 인티푼쿠의 창과 태양의 신전 창은 일직선으로 지어져 동지 날 첫 해가 인티푼쿠를 비추게 되며 곧바로 태양의 신전 창으로 빛이 들어와 이러한 현상이 만들어진다는 설명입니다.

 

하지만 진입이 안 되니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섭니다. 태양의 신전 아래로는 대지를 함축하는 파차마마의 신전이 있고 여기서 많은 머미들이 출현했다고 합니다. 파차마마의 신전 아래로는 지하 세계를 의미하는 물의 신전이 이어지며 마추픽추의 중심 신전이라는 일면을 보여줍니다. 태양의 신전을 돌아나가니 왕의 무덤이 이어집니다. 이 곳에서도 머미가 여럿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명칭을 누가 지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무덤이기보다는 지하 세계를 기리는 의식을 행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신전 지구를 벗어나 방문한 곳은 조금 특이한 거울의 사원입니다. 신전 안에는 3개의 작은 돌 웅덩이가 있고 물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 돌 웅덩이에서는 재미있는 실험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물에 태양이 비추지 않지만 특정 각도에서 바라보면 해가 물에 비춰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울이 가리키는 각도로 바라봐야만 태양이 보입니다. 각도를 조금만이라도 벗어나면 물 위에는 아무것도 비춰지지 않습니다. 3개의 웅덩이는 태양, 달, 별을 비추는 예언의 메시지로 대 사제들은 이 곳에서 예언을 받고 국사에 조언을 했습니다. 신의 뜻이니 웬만한 잉카는 마추픽추의 뜻에 따라야 했을 것입니다. 결국 태양의 나라는 잉카가 아닌 마추픽추가 지배한 것입니다. 티벳에는 라모 라 쵸(Lhamo La tso)라는 호수가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가 승천하면 다음 달라이 라마를 찾기 위해 고승들은 이곳에 모여 명상을 합니다. 고승들은 명상 중에 호수 위로 떠오른 영상을 보게 되고 전국을 헤매고 다니며 이미지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찾아낸 13대 달라이 라마는 청해성 작은 농촌 마을에 사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에서 티벳의 최고 권력자로 환생하게 됩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권력 구조라고 불리는 티벳의 환생불 제도의 단면입니다.

 

신분도, 재능도, 권력도 아무것도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로 수직 상승이 가능한 혁명보다 더 한 신분의 변화입니다. 인간사에서도 가능할까요, 인간사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신이 있기에 가능할 뿐입니다. 신을 쥐고 있는 것이 마추픽추였으니 다시금 마추픽추에 살았던 그들과 그들이 지키려한 그 무엇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갑니다.

 

저는 안내자의 설명을 뒤로하고 와이나 픽추에 오르는 것으로 이틀간의 여행을 끝냅니다. 와이나 픽추는 2~3시간이면 올라갔다 내려올 수 있지만 봉우리를 향한 직선 형태의 오르막과 내리막이어서 힘든 산행입니다. 좁은 등산로에서 생길지 모를 사고를 피하기 위해서인지 입장도 하루에 2~4번 정도로 시간을 분산하여 정해진 시간에 올려 보냅니다.

 

예약도 어렵고 입장료도 별도로 $50을 더 내야하니 사람이 적어 아주 좋았습니다. 특히 정상에 오르면 와이나 픽추를 왜 곤도르의 눈이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됩니다. 마추픽추는 곤도르가 날개를 펼친 모습이고 와이나 픽추는 눈에 해당되는 위치에 있습니다. 눈에 올랐으니 세상에 한 눈에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추픽추의 전반을 조망하기에 아주 좋은 지점입니다. 삭사이우아망은 푸마를 매칭했으니 울부짖다 사라졌고 마추픽추는 곤도르를 매칭했으니 신의 도시답게 하늘로 높이 날아 영원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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