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냥줍에 대한 능동태와 수동태

[나비와 빠루] 제 68부

 

[노트펫] 한자로 고양이를 묘(猫)라고 한다. 고양이 묘를 분석하면 여러 뜻을 가진 단어의 집합체임을 알 수 있다. 왼쪽에 있는 부수는 개사슴 록변(犭)이다. 말 그대로 개와 사슴 같은 동물을 의미한다. 오른쪽의 묘(苗)는 논에 옮겨심기 전에 키운 어린 벼를 뜻한다. 이를 나름대로 의역하면 고양이 묘는 곡식을 지키는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곡식을 도둑인 쥐로부터 지키는 고양이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과 고양이, 두 종(種, species)의 관계는 바늘이 가는데 실이 가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깊기만 하다. 그런데 사람이 주인인 세상에 사는 고양이도 삶의 방식에 따라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물론 두 집단 간의 혈연적인 차이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없다.

 

집고양이는 사람의 집이라는 공간적 울타리 안에서 전적으로 사람의 보호 아래 산다. 먹이, 잠자리, 심지어 임신과 출산까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집고양이와 같이 사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마치 사람의 자녀에 준하는 귀한 대우를 받기도 한다.

 

주인의 보살핌 아래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집고양이, 2019년 여름 촬영
주인의 보살핌 아래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집고양이, 2019년 여름 촬영

 

하지만 모든 고양이가 사람에게 기대어서 살지는 않는다. 야생이 아닌 사람의 세상에 사는 것은 집고양이와 같지만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길고양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길고양이 중에는 완전한 자립을 원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 중 일부는 그렇지 않다. 사람과의 생활을 꿈꾸기 때문이다. 그런 길고양이는 자신의 미래를 행복하게 할 집사 후보들을 찾는다.

 

고양이는 자신에게 맞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안다는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하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여러 경험을 토대로 해석하면 일견 이해가 가는 말이기도 하다.

 

수학에서 두 직선이 서로 평행하면 만나는 접점이 생기지 않고, 말 그대로 평행선만 달릴 뿐이다. 하지만 두 직선이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약간의 경사만 줘도 언젠가는 만난다. 수학에서는 접점이지만, 애묘인(愛猫人)과 고양이에게는 운명 혹은 일대사건(一大事件)이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냥줍’이라는 개념을 이해한다. 보통은 냥줍의 주체를 사람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실상은 고양이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냥줍하는 사람 모르게 오랜 시간 관찰하고 자신의 집사로 점찍고 행동에 나섰을 수도 있다. 고양이의 시각에서는 선택한 사람에게 냥줍을 당해준 것일 수도 있다.

 

커피숍 앞에서 햇볕을 즐기고 있는 고양이. 2020 초겨울 촬영
커피숍 앞에서 햇볕을 즐기고 있는 고양이. 2020 초겨울 촬영

 

영문법 책에 등장하는 능동태, 수동태 구문이 생각난다. 냥줍의 경우에 따라 사람이 능동태 구문의 주어일 수도 있고, 수동태 구문의 주어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어린 시절 함께 했던 나비의 어미도 어머니의 지인이 냥줍한 고양이다. 그 고양이는 며칠 동안 그 분의 집 앞에서 울어댔다. 집에서 살고 싶어 하는 고양이의 기세에 못 이겨 그 분은 결국 대문을 열고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했다. 얼마 뒤 고양이는 나비를 포함한 새끼들을 낳고 이후 계속 그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 필자 가족이 애지중지 키웠던 집고양이 나비는 길고양이의 후손이 된다. 따져보면 일부 고양이들의 운명은 나비 모녀와 같이 길고양이와 집고양이 사이를 오가는 무한한 수레바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물인문학 저자 이강원(powerranger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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